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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는 신라의 천년 궁전인 반월성에서 동북쪽으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곳이다. 통일기에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를 축적한 왕권은 지극히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크고 화려한 궁전을 갖는 데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리하여 통일 직후인 674년에 안압지가 건립되었고, 679년에는 여러 개의 성문과 화려한 궁궐을 갖춘 큰 궁궐이 건립되었다.
동궁 등 궁궐이 있던 안압지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정원이다.
안압지와 주변 건축 유적들은 당시 궁궐의 모습을 보여준다. 신궁 임해전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으나 건물 터의 기초석만 발굴되었다.
임해전과 안압지(安hae地)의 기록에 따르면, 문무왕 14년(674년)과 경덕왕 19년(760년)에 두 차례, 임해 군신에게 연을 바친 기록은 효소 6년(697년)과 안압지(697년)가 있다. 또 소성왕 2년(800년)에 임해문과 인화문이 훼손되었다.
이상을 요약하면 100년마다 궁궐에서 못을 파는 것은 원래 못을 보수하거나 확장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임해전은 못 근처에 지은 궁이다. 또 임해전을 중심으로 한 연못의 정원의 문도 임해문과 인화문이라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적어도 지금의 안압지가 만들어진 날짜는 문무왕 이전이나 그 전후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가 이 연못을 궁궐에 연못으로 기록한 것은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건국될 때 궁궐 구실을 할 수 없었고, 건물이 수리되지 않아 폐허로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의 모습이다. 사진 속의 정자는 일본 식민지 시대 시대에 창건되었고, 지금 황성 공원에 감동을 받는다 지어졌다.
1980년 안압지에서 출토된 토기 파편 때문에 안압지의 원래 이름이 월지(月地)이고 동궁(東宮)이 월지궁(月地宮)으로 불렸다는 주장이 나왔다. 안압지는 반월성과 가깝고 궁궐의 위치가 연못에 비친 포효하는 달을 즐기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현재 안압지라는 이름은 거의 벌거벗은 연못과 울창한 갈대와 부평초 사이를 오리와 거위가 날아다니면서 조선의 침묵하는 손님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연못은 동서 약 190m, 남북 약 190m로 면적은 1만5658㎡(4738평)이며, 3개 섬을 포함한 호안석축의 길이는 1285m이다. 연못의 호수는 광택이 나는 돌로 지어져 동쪽과 북쪽의 능선이 절묘하고, 서쪽과 남쪽의 건물과 직선을 이루었다. 서해안은 직각으로 여러 차례 꼬여 연못에 돌출했다. 따라서 연못의 어느 곳을 보더라도 연못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없고, 연못은 무한정 펼쳐져 있는 것 같다.